‘창조하셨다’는 말 — 존재를 받아 살아간다는 것

02 우물가 산책 · 창세기 1:1; 1:26–27; 히브리서 11:3; 요한복음 1:3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의 만들기와 어떻게 다를까요? 바라와 아사에서 출발해, 존재를 받은 사람이 자기 삶을 살고 책임진다는 뜻을 살펴봅니다.

창세기 1:1; 1:26–27; 히브리서 11:3; 요한복음 1:3핵심 낱말 · 바라 בָּרָא · 아사 עָשָׂה그림 4 · 각주 9

먹선 삽화. 앞쪽에서 두 손이 물레 위의 흙 그릇을 빚고 있고, 그 뒤로 사람의 손이 만들지 않은 강과 숲, 산과 하늘, 새 떼가 넓게 펼쳐진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Mechon Mamre 히브리어 본문에 따른 설명용 번역.1

한 도예가가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듭니다. 손의 힘을 조절하고 벽의 두께를 살피며, 쓰임에 맞게 모양을 잡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릇은 그의 노력과 기술이 만든 하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그 도예가가 닦아온 시간의 깊이를 존중하고 존경합니다.

그런데 그 도예가의 창작은 어디까지일까요? 그릇의 형태를 만든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흙은 어떤가요. 도예가가 흙의 존재까지 만들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흙을 만지는 손과 몸, 기술을 배울 수 있었던 시간, 불을 피우고 그릇을 구울 수 있는 세계는 도예가 이전에 먼저 주어져 있었습니다.

흙덩이와 빚어지는 그릇, 도예가의 손이 함께 보이는 작업실
그릇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집니다. 그 손과 흙의 존재는 또 다른 질문을 남깁니다. · ai 생성 이미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말도 도예가의 창작과 같을까요? 이미 존재하는 재료를 받아 지금의 세계로 빚으셨다는 뜻일까요? 교회가 고백해 온 ‘무(無)로부터의 창조’는 그 재료까지 포함한 세계의 존재를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리고 그 고백 안에는 흙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우리 자신도 들어 있습니다.

‘창조하다’와 ‘만들다’를 함께 읽기

창세기 1장 1절에서 ‘창조하셨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바라(בָּרָא)’입니다. 성경에서 이 말이 창조를 뜻할 때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해서 ‘무로부터의 창조’를 뜻하지는 않습니다.2

곧이어 나오는 인간 창조의 두 구절을 보면 이 구별이 더 분명해집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하다, 만들다’를 뜻하는 ‘아사(עָשָׂה)’ 계열의 표현이 쓰입니다. 다음 27절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서술하며 ‘바라’ 계열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같은 인간 창조를 말하는 인접한 두 구절에 서로 다른 두 동사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12

따라서 “‘바라’는 하나님이 ‘무’에서 창조하는 일, ‘아사’는 인간이 재료로 만드는 일”이라는 도식은 다소 단순한 논리입니다. 인간 창조는 ‘바라’로도 ‘아사’로도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두 말의 쓰임에는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말하는 자리에서 함께 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무로부터의 창조’는 어디에서 읽어낼 수 있을까요? 교회는 성경의 다양한 창조 진술들 속에서 이 고백을 설명해 왔습니다.

요한복음 1: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다. 생겨난 것 가운데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은 앞선 문맥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Nestle 1904 그리스어 본문과 문장부호에 따른 설명용 번역.3

‘모든 것’과 ‘하나도 없다’는 표현을 함께 읽으면, 생겨난 것 가운데 어떤 부분만 하나님과 무관한 근원으로 남겨둘 수 있는지 묻게 됩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도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갖추어졌으며, 보이는 것이 드러나 보이는 것들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만 ‘보이지 않는다’가 곧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는 이 본문들을 함께 읽으며 창조주와 피조세계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이것은 ‘바라’의 사전적 의미를 확인하는 일에서 더 나아간 신학적 독해입니다.4

‘무로부터’라는 말이 더하는 것

‘무’를 상상하려 하면 캄캄한 공간이 떠오르기 쉽습니다. 그 빈 공간에 하나님이 별과 땅을 하나씩 놓으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그 공간이 이미 있다면, 그것 역시 존재하는 무엇입니다. ‘무로부터의 창조’에서 ‘무’는 텅 빈 장소도, 세계로 변하기를 기다리는 재료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재하는 어떤 재료 없이 피조세계 전체를 존재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개혁파 전통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IV.1은 이를 ‘창조하시다, 곧 무로부터 만드시다’라고 표현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96항도 하나님이 창조하시기 위해 미리 존재하는 어떤 것이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고 설명합니다. 두 전통의 모든 설명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이 대목에서는 같은 고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5

흙과 바위, 나무와 물길, 새벽 하늘이 함께 펼쳐진 풍경
모양을 갖춘 사물뿐 아니라 흙과 물, 그 안에 살아가는 생명까지 창조의 고백에 속합니다. · ai 생성 이미지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미 있는 것이 달라지는 변화와, 존재 전체의 근원을 말하는 창조를 구별했습니다. 변화에는 달라지는 무엇이 전제됩니다. 흙이 그릇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흙은 있습니다. 창조를 묻는 질문은 그 흙의 존재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6

이 구별이 한 사람의 삶에는 어떤 뜻을 가질까요? 단순히 ‘나는 소중하다’거나 ‘내 삶에는 목적이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무로부터’라는 수식의 의미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미 있는 재료로 무언가를 만들 때에도 만든 사람의 뜻과 목적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로부터의 창조’가 더하는 것은 하나님께 받았다고 말하는 범위가 능력이나 기회를 넘어, 그 능력을 가진 존재 자체에 이른다는 점입니다. 나를 이루는 어떤 바탕만큼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처음부터 있었다고 남겨두지 않습니다. 나의 몸과 능력, 내가 만나는 사람과 사물 모두가 피조세계에 속합니다.

이것은 부모나 몸의 형성 과정 없이 사람이 생겨났다는 설명이 아닙니다. 생명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묻는 질문과, 그 모든 과정에 참여하는 존재들의 궁극적인 근원을 묻는 질문은 함께 다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존재하게 하셨지만, 행동하는 사람은 나입니다

이제 창조의 고백을 현재의 삶과 연결하려면 보존, 곧 하나님이 피조물의 존재를 지금도 붙드신다는 설명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아퀴나스는 피조물이 계속 존재하는 일도 하나님께 의존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 존재하게 하셨다는 창조의 뜻에, 지금도 존재하게 하신다는 관계를 이어 생각하는 것입니다.7

이 전통을 따라 읽으면,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것은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 내 역량이 모자라는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을 발휘하고 좋은 결과를 얻는 날에도, 그 일을 하는 존재 자체를 내가 마련한 것은 아닙니다. 성공했다고 피조물의 자리를 벗어나는 것도, 실패해서 비로소 피조물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받은 사람에게 자기 삶을 살아갈 자리가 남을까요? 판단하고 행동하는 능력까지 받았다면, 내 행동도 결국 내 것이지 않을까요?

아퀴나스는 하나님이 피조물 안에서 일하신다는 말을 피조물 자신의 작용이 사라진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피조물은 고유한 작용을 갖는다고 설명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306–308항도 피조물에게 스스로 작용하고 다른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이 주어졌으며, 인간은 자유롭게 참여하고 책임진다고 말합니다.8

작업대에서 의자의 이음새를 살피며 자신의 손으로 일하는 목공인
일할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고백은, 그 사람이 실제로 판단하고 수고한다는 사실과 함께 놓입니다. · ai 생성 이미지

이 설명을 우리의 삶에 연결해 보면, 자기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 자기 존재의 최초 원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말을 고르고 잘못을 인정해 사과한다면, 사과하는 사람은 실제로 나입니다.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 행동을 가짜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앞의 도예가에게도 돌아가 볼 수 있습니다. 흙과 몸과 능력이 주어졌어도 그릇을 빚은 수고는 실제로 그 사람의 것입니다. 하나님께 존재를 의존한다는 고백 안에서도 인간의 판단과 행위는 자기 자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에 의한 존재로서 자기 삶을 살아간다는 뜻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한 일에 책임진다는 것

행동이 실제로 나의 것이라면, 그 행동의 책임도 따라옵니다. 내가 태어날지 결정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 말과 행동의 책임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내 말을 돌아보고, 사과하고, 가능한 피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말할 능력을 하나님께 받았다는 이유로 그 책임을 하나님께 넘길 수는 없습니다. 아퀴나스 역시 의지가 다른 원인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이 자신의 내적 원리에서 행동한다는 사실과 행위의 귀속을 없애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9

그런데 책임진다는 것은 어디까지일까요? 아픈 가족을 돌보는 사람은 필요한 도움을 살피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돌봄을 제공합니다. 무엇을 놓쳤는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살펴봐야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회복과 미래 전체를 혼자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창가에서 나이 든 어머니에게 물 한 잔을 건네는 딸
건네는 물 한 잔은 실제 돌봄입니다. 그 돌봄의 책임과 한 사람의 미래 전체를 결정하는 힘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 ai 생성 이미지

결과를 모두 통제할 수 없다는 이유로 책임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동시에 모든 결과를 보장해야만 책임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한 일과 그 영향을 살피는 책임은, 유한한 사람이 감당하는 책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존재하게 하셨고, 내가 실제로 행동하고, 그 행동의 책임은 내게 있다는 것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존재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으며, 그렇게 존재하게 된 사람은 받은 능력으로 실제 삶을 살아갑니다. 그 삶에서 이루어진 판단과 행동에는 책임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잘 해낸 날에는 자신의 판단과 수고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일이 어긋난 날에는 자신이 한 일을 살피고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어느 날에도 그 일을 하는 존재 자체까지 자신의 성취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나이지만, 내 존재의 궁극적인 근거는 나 자신이 아닙니다.

창세기의 첫 문장을 다시 읽으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안에 흙과 그릇만 있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만드는 사람, 그릇을 건네받는 사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살아가는 우리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존재를 의존하면서 자기 삶을 산다는 고백은 바로 이 삶을 가리킵니다.

그 의존을 신뢰와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와 이어집니다. 존재를 받았다는 설명만으로 사랑과 선함의 의미까지 모두 풀리지는 않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유와 선함, 그리고 왜 세계를 창조하셨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주와 참고문헌

성경 인용의 한국어는 원문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설명용 번역이며 공인 한국어 성경 번역의 인용이 아닙니다. 창조·보존·피조물의 행위를 삶과 연결하는 대목은 아래 문헌을 바탕으로 한 이 글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모든 설명을 ‘바라’의 뜻이나 창세기 1:1 한 절에서 직접 도출한 것은 아닙니다. 삽화는 본문의 이해를 돕는 창작 이미지입니다.


  1. Mechon Mamre, 창세기 1장 히브리어 본문, 1·26–27절. 1절은 독립문 독해를 따랐습니다. 26–27절은 본문 내용을 요약하고 동사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 ↩︎

  2. Brown, Francis, S. R. Driver, and Charles A. Briggs. A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I ברא의 Qal 항목과 I עשה 항목. Bible Hub의 BDB 전재: ‘바라’, ‘아사’. 같은 자음의 다른 어근·활용을 모두 하나의 뜻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전재의 인쇄 판본·쪽수는 확인되지 않아 표제어로 인용합니다. ↩︎ ↩︎

  3. Greek New Testament: Nestle 1904, Bible Hub의 요한복음 1:3. 끝의 ‘ὃ γέγονεν’을 앞 문장에 잇는 이 판본의 문장부호를 따랐습니다. 이를 다음 절에 연결하는 판본도 있습니다. ↩︎

  4. Greek New Testament: Nestle 1904, Bible Hub의 히브리서 11:3. ‘αἰῶνας’를 여기서는 ‘세계’로 풀었습니다. 본문은 내용 요약이며 ‘보이지 않는 재료’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구절로 읽지 않았습니다. ↩︎

  5.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IV.1, OPC 게재 본문의 “to create, or make of nothing”을 번역했습니다. Catholic Church,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296, Vatican 영문판. 서로 다른 교회 전통의 문헌에서 선재하는 재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비교했습니다. ↩︎

  6.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e, I, q.45, a.1 ad 3; a.2 ad 2. New Advent 영어 번역. Fathers of the English Dominican Province 번역, second and revised edition, 1920. 변화와 창조의 구별을 요약했습니다. ↩︎

  7. Aquinas, 같은 저서, I, q.104, a.1 본문 및 ad 4; a.2. 영어 번역. 존재의 보존과 피조물 사이의 원인 관계를 참고했습니다. 부모·음식·돌봄 등의 구체적인 관계를 배제하는 의존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

  8. Aquinas, 같은 저서, I, q.105, a.5 본문 및 ad 1–2, 영어 번역. Catholic Church,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306–308, Vatican 영문판. 피조물의 고유한 작용을 설명하는 문헌입니다. 사과·도예·돌봄의 예와 삶에 관한 연결은 이 글의 해석입니다. ↩︎

  9. Aquinas, 같은 저서, I, q.105, a.4 ad 3, 영어 번역. 받은 능력과 행위의 귀속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 글은 자유의지에 관한 모든 교회 전통의 견해가 동일하다고 전제하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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